프랑스 화가 구스타프 쿠르베의‘안녕하시오 쿠르베씨?’라는 작품은 자신을 후원하는 클라이언트를 만나는 쿠르베 자신을 그린 작품이다. 돈 많아 보이는 의뢰인 일행은 모자를 벗어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데, 화구를 맨 초라한 차림의 쿠르베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감히 ‘짝다리’를 하고 있다. 주석으로 달린 해설엔 자신의 천재성에 대한 자부심을 거만하리만치 표현했다고 한다. 위대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만나기 위해선 돈으로 작품을 소장하던가 발품을 팔아 눈으로 얻어보는 방법 뿐이던 그시절, 아우라로 먹고사는 쿠르베 형님의 작렬하는 포스는 연말 PS를 털어서라도 구매하고 싶을 지경이다.
“로고 좀 키워 주시구요...”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제작물 관련 피드백을 받을 때 가장 많이 듣는 말중의 하나가 로고 좀 키워 달라는 말이다. 제작의 대응 방식은 대략 세가지. 엄청나게 크게 키워 (대략 200% 정도?) 다음엔 로고 이야기가 나오지 않게 하기. 아주 쬐금만 (5~7%) 키워 보내기. 이럴 경우엔 다음번엔 좀 더 화끈하게 키워 달라고 하지만 그 때에도 아주 쥐똥만큼만 키운다. 지금의 로고 크기가 적절하니 더이상 안키우는게 좋겠다는 소극적인 저항의 한 방법이다. 마직막으로 절대 키우지 않고 담당 AE를 붙잡고 현재 사이즈의 적정성을 목에 힘주어 피력하는 방식. 맞은 편의 AE는 그럴때마다, “알죠, 박아트님의 말씀은 알겠는데...”라고 말하고 그런 그네들을 볼때면 할 말은 바닥난다. 그들의 곤란함 역시 나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럴 땐 광고물에 적용되는 로고 사이즈에 대한 국제 표준규격이 있거나, 누군가가 ‘광고물에 적용되는 기업 상징의 적절한 사이즈 연구’라는 논문이라도 그럴 듯하게 써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해당 기업의 로고 혹은 심벌마크를 남과 다름을 알려주는 차별의 요소로 이해하는 축소지향의 대행사와 ‘내가 누구다!’라고 말해 주는 식별의 수단으로 받아들이는 확대지향의 광고주간의 견해차에서 오는 한 예일 뿐이지만, 이것 말고도 클라이언트와 대행사간의 혹은 회사 내에서도 입장 차이에서 오는 고단함이 날 힘들게 할 때가 있다. 제작물에 대한 관계자들의 관점의 차는 당연한 것이며, 그에 대한 조정과 협의는 우리의 주된 업무이기도 하다. 하지만 설익은 몇년전만 해도 회사생활을 가장 힘들게 하는 이유중 하나가 바로 ‘전문성에 대한 도전’에서 오는 박탈감이었다. 대학때 ‘디자인 실무’라는 강의중에 디자이너로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전문성에 대한 도전’이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그런‘도전’을 용납하는 순간, 당신의 가격은 터무니없이 네고되며, 불필요한 잔업의 발생, 작업물의 질적 저하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졸업 후 도전을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순진한 맘으로 이곳에 발을 들였지만 세상엔 온통 전문가들 뿐, 내말을 곧이 곧대로 수용할 순진 무구한 비전문가들은 어디에도 있지 않았다. 곳곳에 포진한 전문가들은 내 구역을 공유하고 있었고, 그들과 나의 교집합의 영역에서는 매일 매일 전투가 벌어진다. 디자인에 대한 누군가의 ‘도전’과 그에 대한 나의 합당한‘응전’이 상대방에겐 자신의 영역에 대한 말도 안되는 도전으로 받아들여졌을 터이고, 그 전투에서 번번히 고꾸라진 나는 이를 견뎌내야 하는 것이 너무나도 힘든 상황 그 자체였다. 그때부터 한치도 자라지 못해 아직도 나는 화를 내기 일쑤며, 여전히 무력하다. 그때보다 하나 늘어난 게 있다면 철썩같이 믿었던 내 전문성도 그리 특출날 게 없다는 현실인식. 완곡해진 표현과 능글맞은 미소, 다분히 전략적인 중저음 목소리만 갖고 잘 나가는 선배들 따라붙을라면 스트론튬의 반감기에 해당하는 시간이 걸리지 모른다. 쿠르베 형님같은 빳빳한‘캐뤼즈마’는 감히 바라지도 않는다. 일에 좀 치이고 잘 안풀린다 싶은 요즘같은 날엔 크게 지지 않는 사람이 진짜 고수란 생각이 든다.
“로고 좀 키워 주시구요...”전화기 너머 들려오는 제작물 관련 피드백을 받을 때 가장 많이 듣는 말중의 하나가 로고 좀 키워 달라는 말이다. 제작의 대응 방식은 대략 세가지. 엄청나게 크게 키워 (대략 200% 정도?) 다음엔 로고 이야기가 나오지 않게 하기. 아주 쬐금만 (5~7%) 키워 보내기. 이럴 경우엔 다음번엔 좀 더 화끈하게 키워 달라고 하지만 그 때에도 아주 쥐똥만큼만 키운다. 지금의 로고 크기가 적절하니 더이상 안키우는게 좋겠다는 소극적인 저항의 한 방법이다. 마직막으로 절대 키우지 않고 담당 AE를 붙잡고 현재 사이즈의 적정성을 목에 힘주어 피력하는 방식. 맞은 편의 AE는 그럴때마다, “알죠, 박아트님의 말씀은 알겠는데...”라고 말하고 그런 그네들을 볼때면 할 말은 바닥난다. 그들의 곤란함 역시 나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이럴 땐 광고물에 적용되는 로고 사이즈에 대한 국제 표준규격이 있거나, 누군가가 ‘광고물에 적용되는 기업 상징의 적절한 사이즈 연구’라는 논문이라도 그럴 듯하게 써줬으면 하는 바램이다. 해당 기업의 로고 혹은 심벌마크를 남과 다름을 알려주는 차별의 요소로 이해하는 축소지향의 대행사와 ‘내가 누구다!’라고 말해 주는 식별의 수단으로 받아들이는 확대지향의 광고주간의 견해차에서 오는 한 예일 뿐이지만, 이것 말고도 클라이언트와 대행사간의 혹은 회사 내에서도 입장 차이에서 오는 고단함이 날 힘들게 할 때가 있다. 제작물에 대한 관계자들의 관점의 차는 당연한 것이며, 그에 대한 조정과 협의는 우리의 주된 업무이기도 하다. 하지만 설익은 몇년전만 해도 회사생활을 가장 힘들게 하는 이유중 하나가 바로 ‘전문성에 대한 도전’에서 오는 박탈감이었다. 대학때 ‘디자인 실무’라는 강의중에 디자이너로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전문성에 대한 도전’이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그런‘도전’을 용납하는 순간, 당신의 가격은 터무니없이 네고되며, 불필요한 잔업의 발생, 작업물의 질적 저하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졸업 후 도전을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순진한 맘으로 이곳에 발을 들였지만 세상엔 온통 전문가들 뿐, 내말을 곧이 곧대로 수용할 순진 무구한 비전문가들은 어디에도 있지 않았다. 곳곳에 포진한 전문가들은 내 구역을 공유하고 있었고, 그들과 나의 교집합의 영역에서는 매일 매일 전투가 벌어진다. 디자인에 대한 누군가의 ‘도전’과 그에 대한 나의 합당한‘응전’이 상대방에겐 자신의 영역에 대한 말도 안되는 도전으로 받아들여졌을 터이고, 그 전투에서 번번히 고꾸라진 나는 이를 견뎌내야 하는 것이 너무나도 힘든 상황 그 자체였다. 그때부터 한치도 자라지 못해 아직도 나는 화를 내기 일쑤며, 여전히 무력하다. 그때보다 하나 늘어난 게 있다면 철썩같이 믿었던 내 전문성도 그리 특출날 게 없다는 현실인식. 완곡해진 표현과 능글맞은 미소, 다분히 전략적인 중저음 목소리만 갖고 잘 나가는 선배들 따라붙을라면 스트론튬의 반감기에 해당하는 시간이 걸리지 모른다. 쿠르베 형님같은 빳빳한‘캐뤼즈마’는 감히 바라지도 않는다. 일에 좀 치이고 잘 안풀린다 싶은 요즘같은 날엔 크게 지지 않는 사람이 진짜 고수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