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 컴컴한 저 길의 끝에는 무엇이 똬리를 틀고 있을까? 놀이동산 귀신의 집이 무서운 이유는 존재가 지닌 두려움이 아니다. 어둠 속에서 무엇이 올지 알 수 없다는 ‘미지’ 자체에 있다. 공포의 실체를 확인하는 순간의 절정을 지나면 두려움은 반감이 된다. 귀신의 집을 두번이나 줄서서 가지 않는 이유다. 지금 대한민국의 경제는 아마 귀신의 집 입구에 서있지 않을까? 경제 신문 변변히 읽지 않는 종자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지 모르시겠지만 세월이 수상해 들리는 풍월도 있고, 금융업과 관련된 TV-CM을 준비하며 이리 저리 ‘공부’한 덕택이기도 하다. 지금의 경제대란의 한 원인이라는 ‘파생상품’이라는게 딱 그렇다. 예측할 수 없기에 두려운 존재, 통제의 범위를 벗어난 괴물을 바라보는 전문가의 불확실한 견해들, 세상에 괴물을 풀어놓은 소위 금융전문가라는 이들이 두려워하는 이유는 괴물의 끝을 그들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파생상품과 관련된 이론으로 노벨상을 수상했던 금융전문가조차 사모펀드를 3개나 말아 먹었다고 하니, 예측할 수 없는 통제불능의 세상에서 우린 수많은 억측들에 기대어 살고 있다.
‘윤택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불확실한 상황을 불확실하게 말하는 사람’
‘전문가가 가장 필요한 사람은 바로 전문가 자신들’
냉소적인 표현을 빌어 표현한 ‘전문가’에 대한 회의론이다. 전문가란 가장 잘아는 사람의 다른표현이다. 가장 잘 알기 위해서는 가장 많이 알아야 했다. 양이 곧 질을 불러 일으킨다고 믿기 때문이다. 정보화 시대라 불리는 지금, 우린 정보란 키보드만 누르면 쉽게 얻을 수 있다고 세뇌되어 살아가고 있다. 널려있는 정보를 통해 우린 쉽게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진실은 어둠속에 있고,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제한적이다. 지식의 합이 곧 지혜라는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의 ‘양’이 아닌 수많은 데이터를 간략화 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명쾌한 기준이다. 다시 말해 지식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현명한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고명한 CEO에게 얻어듣는 고금의 진리를 나이트 ‘삐끼’의 길바닥 영업론에서 얻지 말란 법은 없다. 지혜에는 그럴싸한 학위가 없기 때문이다.
아집의 질감을 손으로 만질 때마다 ‘전문가’라는 이름이 만들어 놓은 벽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자문해 본다. 광고를 신나게 배우던 초창기, 내가 그렇게 흥이 났던 이유가 내 근거나 생각이 그럴듯한 통계나 이미지로 표현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혹시 세상의 새로운 길의 열쇠를 갖고 있는게 아닌가? 라는 착각. 전문가라는 확신이 점점 딱딱해질 때마다 나만은 정답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경도되어 간다. 정답에 대한 강박증은 반복되는 질문에 짜증내기 쉽상이다. 가끔 대학생 공모전 1차 심사를 할 때마다 그 판단기준이 나의 정답에 얼마나 근접해 있는가에 있음을 지금에서야 안다. 그 기준에 따라 그들의 소중한 작품은 올라가고 내려간다. 어처구니 없는 질문을 던지는 작품엔 감히 짜증이 나기도 하며, 과정의 신성함을 무시해 버리는 아집. 모든 질문에 정답이 필요할 이유는 없다. 정답을 내야한다는 집착이 만든 세상엔 질문의 입구가 봉쇄되어 있다. 정답을 품지않은 질문. 그 질문의 길이 막힌 전문가의 세상엔 아집이 만든 불확실한 전망만이 있다. 이방인들의 이질적인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집단에게 미래는 말을 걸지 않을 테니까.
천체 물리학의 성과는 저 먼 태양도 몇만광년 너머의 은하계의 정체까지도 속속들이 밝혀내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발딛고 사는 지구의 내부는 아직 정확히 규명된 것이 없다 한다. 날이 갈수록 등잔밑의 어둠은 짙어간다. 우리의 ‘전문가적’ 지위에 대한 회의를 던진다는 건 불확실한 시장에 대한 항복선언일 수도 있다. 업에 대한 불경한 생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르기 때문에, 세상은 모르는 것 투성이기 때문에 모른다고 말해야 하는 전문가의 길은 또 다른 모색을 하게 만든다.
‘윤택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불확실한 상황을 불확실하게 말하는 사람’
‘전문가가 가장 필요한 사람은 바로 전문가 자신들’
냉소적인 표현을 빌어 표현한 ‘전문가’에 대한 회의론이다. 전문가란 가장 잘아는 사람의 다른표현이다. 가장 잘 알기 위해서는 가장 많이 알아야 했다. 양이 곧 질을 불러 일으킨다고 믿기 때문이다. 정보화 시대라 불리는 지금, 우린 정보란 키보드만 누르면 쉽게 얻을 수 있다고 세뇌되어 살아가고 있다. 널려있는 정보를 통해 우린 쉽게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진실은 어둠속에 있고,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제한적이다. 지식의 합이 곧 지혜라는 등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식의 ‘양’이 아닌 수많은 데이터를 간략화 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명쾌한 기준이다. 다시 말해 지식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현명한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고명한 CEO에게 얻어듣는 고금의 진리를 나이트 ‘삐끼’의 길바닥 영업론에서 얻지 말란 법은 없다. 지혜에는 그럴싸한 학위가 없기 때문이다.
아집의 질감을 손으로 만질 때마다 ‘전문가’라는 이름이 만들어 놓은 벽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자문해 본다. 광고를 신나게 배우던 초창기, 내가 그렇게 흥이 났던 이유가 내 근거나 생각이 그럴듯한 통계나 이미지로 표현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혹시 세상의 새로운 길의 열쇠를 갖고 있는게 아닌가? 라는 착각. 전문가라는 확신이 점점 딱딱해질 때마다 나만은 정답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경도되어 간다. 정답에 대한 강박증은 반복되는 질문에 짜증내기 쉽상이다. 가끔 대학생 공모전 1차 심사를 할 때마다 그 판단기준이 나의 정답에 얼마나 근접해 있는가에 있음을 지금에서야 안다. 그 기준에 따라 그들의 소중한 작품은 올라가고 내려간다. 어처구니 없는 질문을 던지는 작품엔 감히 짜증이 나기도 하며, 과정의 신성함을 무시해 버리는 아집. 모든 질문에 정답이 필요할 이유는 없다. 정답을 내야한다는 집착이 만든 세상엔 질문의 입구가 봉쇄되어 있다. 정답을 품지않은 질문. 그 질문의 길이 막힌 전문가의 세상엔 아집이 만든 불확실한 전망만이 있다. 이방인들의 이질적인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집단에게 미래는 말을 걸지 않을 테니까.
천체 물리학의 성과는 저 먼 태양도 몇만광년 너머의 은하계의 정체까지도 속속들이 밝혀내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발딛고 사는 지구의 내부는 아직 정확히 규명된 것이 없다 한다. 날이 갈수록 등잔밑의 어둠은 짙어간다. 우리의 ‘전문가적’ 지위에 대한 회의를 던진다는 건 불확실한 시장에 대한 항복선언일 수도 있다. 업에 대한 불경한 생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르기 때문에, 세상은 모르는 것 투성이기 때문에 모른다고 말해야 하는 전문가의 길은 또 다른 모색을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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