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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

그녀를 울리지 마세요


그녀는 진정 나보다 잘 나갔음이 분명하다. 나와 비슷한 연차였을 때에도 분명 더 높은 고과와 연봉을 챙겼으며, 주변의 좋은 평판을 들으며 탄탄한 그녀의 길을 가고 있었다. 그녀 덕분에 내 삶은 윤택했으며, 그것이 곧 나의 경쟁력이 되기도 했다. 그녀의 승승장구가 나에겐  자랑이었고 고마웠으며, 한편은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다 그녀에게 큰 변화가 찾아왔다. 그녀의 뱃속에 나의 아기가 들어온 것이다. 그녀는 힘들어했고 그녀는 그것을 견뎌내는 듯했다. 이기고 헤쳐 나갈 수 있는 것. 그것이 내가 아는 그녀의 저력이고 능력이었다. 그러던 그녀가 어느 날 회사를 그만두고 첫째 아이의 육아에 전념하겠다고 조용히 말했다. 난 별말 없이 그러라고 했다. 그런 후 전쟁같은 날이 시작되었다.  밤새 우는 큰애를 달래다 아이가 잠든후 녀석보다 더 많이 우는 날이 많았으며 그때 마다 난 어찌해야 할 줄 몰랐다. 마땅히 건낼 말도 떠오르지 않았고 전하는 말이라곤 힘내라는 말 뿐,  걱정은 담겨있되 진심은 담겨있는지도 애매한 말의 나열. 3인칭 관찰자의 그런 말마냥 건조하게 입술을 움직여 내뱉는 말들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철두철미하고 나보다 똑똑하며 주변의 평가에 민감하다. 둘째까지 태어난 지금 그녀는 아이 주변의 모든 일에 자신을 몰입하고 자책하며, 몰입하며 자책하기를 반복한다. 그녀는 여전히 부지런하다. 아니 전보다 더 열심이다. 그리고 전보다 더 열심히 화를 낸다.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말이다. 당연히 화를 내는 그녀는 예전보다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이상한 노릇이다. 나는 결혼초나 지금이나 내 아내가 행복하길 바란다. 명품백을 주문하는 그녀에게 단 한마디 태클도 걸지 않았고, 주말마다 부지런히 그녀와 함께 어디론가 나가고 즐기고 쏘다니다. 온다. 그때보다 더 행복해진 그녀의 힘이 완벽하게 가정을 컨트롤하길 바란다. 그래서 생긴 에너지에 힘입어 나의 야근에, 나의 창의적 발상에, 금요일에 있을 회식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길 원한다. 불행하지 않은 나의 이기심이다. 며칠 전에 내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갈 첫째아이와 관련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계기라면 그녀가 세번째로 읽던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라는 소설이랄 수 있다. 아이를 낳지 않은 신혼부부가 절대 읽어선 안될 가공할 만한 ‘공포의 소설’이라고 우리가 명명한 그 책이다. 오랜 이야기 끝에 내린 결론은 아내가 좀 더 ‘이기적인 존재가 될 수 있도록 하자’ 였다. 나의 회식과 야근만큼이나 그녀의 시간의 비율을 높이자. 그녀에게서 아들 녀석들을 좀 더 멀어지게 하자. 그러기 위해선 ‘대표선수’로서의 나의 지위도 당연히 내려올 수 밖에 없다. 아이는 좀 더 방치되어야 하고, 집안은 좀더 어지러워질 수 있다. 내가 해야 할 몫들이 더 많아져야한다. 선심쓰듯 ‘해주는’ 가사가 아닌 당연한 몫으로서의 분담. 엄마 대 바깥사람의 문제가 아닌 같은 아이를 키운다는 동질감에서부터 시작하자 했다. 그래야 그녀가, 아이의 엄마가, 나의 MUSE가 행복할 것 같다고 하지 않은가?
 
 누구의 엄마이자 아내이고, 회사에 다니며 나와 함께 광고를 만드는 그녀들의 행복 또한 기원하기로 했다. 이건 좀 더 현실적인 이유다. 육아문제로 골머리 앓지 않고 화끈한 아이디어로 나를 깜짝 놀라게 하는 재미를 위해서라도 그녀들이 파랗게 질려 집으로 뛰쳐 나가는 일은 없어야겠다. 철두철미하고 완벽에 가까운 일처리에 혀를 내두르기도 하지만 내리사랑의 감흥에 푹 빠져 사랑의 아우라를 발하는 엄마 광고인들이 주는 찬란함은 감동을 준다. 자발적인 사랑에 기반한 그녀들의 에네르기는 이땅의 아이를, 회사를 그리고 나를 포함한 아빠들을 살게 하는 힘이다. 나는 페미니스트도 아니요 지면을 빌어 여사우들에게 점수를 딸 하등의 이유도 없다. 오히려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존재이다. 그런 이기주의자로서 행복하길 바라고 즐겁길 원한다. 하지만 이기적인 계산법으로 주판알을 튕겨봐도 내가 행복해지려면 내가 조금 불행해져야 한다는 결과가 나온다. 그래야 집에서나 회사에서나 내가 살 수 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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