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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

공간적응

"이집은... 우리 가족한테 버림 받을 것을 알고 두려워 하는 것이다." 

일본의 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이름없는 독'이라는 소설에서 사건의 현장이 된 주인공의 고급빌라를 보며 등장인물이 내뱉는 말이 이렇게 나온다. 몇년전부터 새로운 건축물에서 내뿜는 새집 증후군에 대해 신문과 뉴스는 이야기한다. 하지만 인간이란 또 어떤 존재인가? 그들이 못지 않게 내뿜는 독소도 만만치 않은 법. 사람의 몸도 공간에 종속되지만 집이든, 책상이든 한몸이 점하고 있던 일정 부분도 인간이 내뿜는 무엇인가에 길들여지는 법이다. 이 한문장에 이렇게 인상에 남은 이유는 그와 흡사한 감정을 나도 느꼈기 때문이리라. 결혼 후 처음 얻은 신혼집. 그렇게 대단할 것 없는 작은 공간이었지만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에 선 두 사람들에겐 무척이나 의미있는 장소다. 기쁜맘으로 매일 들락날락 거리며 공들이던 집에서 그 해, 우리의 첫아이가 생긴 이후 우린 정신없이 병원과 조리원을 오고 갔다. 이후에 처가집으로 이어진 산후조리기간에 그 보금자리는 홀로 방치된 채 멀어져 있었다. 아이가 태어나던 새벽에 부랴부랴 떠난 이후 정말 오랜만에 돌아온 신혼집을 다시 만났을 때. 그 집은 말그대로 짜증을 내고 있었다. 별말없이 외출을 다녀온 주인에게 복수하는 애완견마냥, 온기 가득하던 공간은 간 데 없고 들뜬 벽지색이며 음침하게 풍기는 냄새에서 이 집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알 수 있었다. 
 평소에 어지럽던 그런 기분이 아닌 분명한 메시지를 말하고 있는 공간에 발을 딛는 그 순간. 집도 나를 버렸고, 나 역시 집에 대해 더이상의 감정이 없음을 알 수 있었다.  
 
 1월의 조직개편에 따른 자리이동. 매년 한 번 이상 있었던 이사철이다. 마지막 짐을 옮길 때 나의 옛 곳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지만 무언가 남아있기 마련이다. 남아있는 커피자국, 한줄로 정렬한 먼지 더미가 그리는 묘한 그림들은 공간과 내가 나누었던 이야기의 흔적이다. 어쩜 미련일수도 있고, 아니면 진짜 독일 수도 있다. 앞으로 앉게 될 누군가가 윈덱스를 뿌리며 티슈가득 새카만 먼지를 걷어낼 때, 그제서야 나의 이사는 마무리 된다. 이사는 이렇게 끝이며 이게 내가 책상을 닦지 않고 도망치고 나온 쓸쓸한 변명이다. 반면 새자리에 앉아보니 웬지 한기가 느껴지고 피곤함이 스며든다. 누누히 생각하고 말했지만 인간은 진정 변화를 싫어하는 존재다. 생소한 시각은 새로운 언어를 유발한다. 그 언어는 예전과는 다른 사고를 동반하며 이는 곧 주변과 긍적적인 마찰음을 낸다. 그 필요성을 떠나 개인적으로 무척 피곤한 일이다. 그러나 며칠 지나지 않아 인간의 독소는 주변을 오염시켜 버린다. 나도 익숙해지고 책상도 익숙해 질 그때쯤이면, 공간과 사람은 서로를 끈끈하게 붙잡아 매고 있다. 이때부터 피곤함은 친근감으로 전환된다. 책상이 새 것일수록 주변의 인테리어가 아름다울 수록 몸과 공간의 구속력은 크다.이런 신속한 적응력에 예전의 그 신혼집은 분노했었겠지? 그만큼 우린 무신경하고 이기적이며 공간의 입장에서 참 매몰찬 존재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런 게으르고 얄팍한 공간적 이기심이 다시 한번 위협받으려 하고 있다. 그 첫번째 변화는 5년전인가 6년전인가, 디자이너들에게 맥북 노트북을 지급하던 때이다. 커다란 데스크톱 컴퓨터에 매어있던 우리의 반경이 노트북의 지급으로 5m로 넓어졌다. 기껏 5m냐 하겠지만 그 5m에는 내가 해야할 일들의 모든 것이 들어오는 혁명적인 거리였다. 겨우 그 ‘혁명적 5m’에 적응할 때 쯤 되니, 이제 세상은 기술적 발전을 들어 나를 자꾸 일으키고 등을 떠밀어 책상이라는 것을 뺏으려 한다. 아니 오히려 세상이라는 어마어마하게 큰 책상에서 일하라 한다. 아, 그 큰 책상을 오염시키고 길들이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겠냔 말이다! 그 공간을 다 채우려면 얼마나 더 욕심을 부려야 하냔 말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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