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의 주단을 깔고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 그대 떠나는 날 비가 오는가?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꺼야 ...내게 사랑은 너무 써.
강변북로를 내달리던 택시의 뒷자석에서 산울림의 노래가 나오자 서둘러 차창문을 올린다. 그 날 따라 무슨 맘이 들었는지 시원한 바람소리 마저도 거추장스럽게 만들어버리는 그들의 노래에 나는 그만 무장해제되고 말았다. 그들이 한국 록의 전설인 것이야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심야의 음악프로 진행자가 줄줄이 나열하는 대표곡 명단 하나 하나를 이어 붙이니, 이건 한 편의 시가 아니던가? 굳이 광고에 빗대어 노래의 가사가 바디카피라 치면 그 제목은 헤드라인 카피라 할 수 있을 터인데, 그렇다면 카피라이터 김창완은 나라는 소비자로 하여금 그들의 상품을 사지 않고는 못배기게 만드는 흡입력을 가진 명카피라이터라 하겠다. 그의 생각이 내앞으로 걸어와 말을 건네는 듯한 그런 문장을 그의 몸 어디에서 끌어 오는 걸까?
외식이 잦았던 가정의 달 5월을 맞이하야 ‘신발 분실 시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라고 써놓은 돼지갈비집을 갔었으며, 그 다음 날엔 ‘신발은 우리가 책임을 지니, 맘놓고 드세요’ 라고 써붙인 불고기 집을 갔었드랬다. 몇일이 지난 지금, 고만 고만한 두 고깃집의 맛은 기억에 남지 않는다. 어느 집이 더 훌륭한 서비스를 제공했는지도 기억에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신발 걱정 말고 맛있게 드시라는 품이 넉넉한 주인장은 웬지 인상이 좋을 것 같다는 것이다. 실제 그 주인이 잃어버린 신발을 현금으로 보상해주었는지 아니면 철통같이 신발을 지키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지만 마음만은 뽀-오너스로 충분히 받은 듯 한 기분. 서툰 매직글씨의 종잇장이 깔끔하게 인쇄된 아크릴판을 이긴 순간이다. 비주얼이든, 텍스트가 되든 마음을 전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마음으로 전해지는 메시지를 쪼개고 쪼개면 결국 무엇이 남을까? 오랜 기간 함께 써왔던 모국어의 조각이 있지 않을까? 언어적 경험의 산물은 송아지가 일어서듯 단기간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언어의 성장은 더딘 법이다. 일주일에 새로운 단어 하나씩을 추가해가는 둘째 녀석을 보며 말이 조금씩 늘어가는 프라이데이와 로빈슨 크루소의 관계처럼 경험을 같이 공유해간다는 기분이 든다. 늘어나는 것은 어휘의 수에 그치지 않는다. 그와 내가 상호간에 오간 어휘가 완만하게 늘어나면서 우리의 관계도 느리지만 탄탄하게 쌓여간다는 기쁨이 있듯, 카피라이터들은 모국어라는 가장 친근한 수단으로 사람들과 대화한다. 디자이너라고 언어적 매개가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말과 글이라는 가장 순수한 재료를 다루는 영역은 누가 뭐라해도 카피라이터라 불리는 이들의 기능적 성역이다. 안다면 알고, 모른다면 모를 우스개 소리중에 제작에서 가장 쓸모 없는 직군은 바로 ‘신입 카피라이터’라는 말이 있다. 그림을 그릴 줄 아나? (가끔 잘 그리는 변종 카피가 있긴 있다.) 툴을 다룰 줄 아나? (이 역시 가끔 있다.) 보드라도 자르라 시키면 열에 하나는 피를 보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신입카피들이여 공분하여 일어나지는 말라. 내가 본 모든 병아리 카피라이터들은 광고의가장 신선한 재료를 부담없이 만지고 다듬고, 냉장고에 넣었다 빼듯 사람의 맘속을 여닫는 과정을 배워갔다. 그 유예기간은 신입아트로서는 갖기 힘든, 그래서 부럽고 샘이 나는 부분이다. 말을 다루는 느리지만 단단한 과정을 거친 카피라이터들은 재료를 잘 알기에 더욱 멋진 요리를 내놓을 수 있는 모국어의 조리사들이 된다. 그렇게 그들은 뉴욕의 제임스 프로도, 캄차카 반도의 이바픈노므스키도 알 수 없는 ‘주단’과 ‘비단’의 차이를 알며 고를 수 있는 이가 된다. 그 카피라이터들이 내놓는 맛나는 카피를 접할 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저, 요리사좀 불러주시겠어요?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싶네요...”
강변북로를 내달리던 택시의 뒷자석에서 산울림의 노래가 나오자 서둘러 차창문을 올린다. 그 날 따라 무슨 맘이 들었는지 시원한 바람소리 마저도 거추장스럽게 만들어버리는 그들의 노래에 나는 그만 무장해제되고 말았다. 그들이 한국 록의 전설인 것이야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심야의 음악프로 진행자가 줄줄이 나열하는 대표곡 명단 하나 하나를 이어 붙이니, 이건 한 편의 시가 아니던가? 굳이 광고에 빗대어 노래의 가사가 바디카피라 치면 그 제목은 헤드라인 카피라 할 수 있을 터인데, 그렇다면 카피라이터 김창완은 나라는 소비자로 하여금 그들의 상품을 사지 않고는 못배기게 만드는 흡입력을 가진 명카피라이터라 하겠다. 그의 생각이 내앞으로 걸어와 말을 건네는 듯한 그런 문장을 그의 몸 어디에서 끌어 오는 걸까?
외식이 잦았던 가정의 달 5월을 맞이하야 ‘신발 분실 시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라고 써놓은 돼지갈비집을 갔었으며, 그 다음 날엔 ‘신발은 우리가 책임을 지니, 맘놓고 드세요’ 라고 써붙인 불고기 집을 갔었드랬다. 몇일이 지난 지금, 고만 고만한 두 고깃집의 맛은 기억에 남지 않는다. 어느 집이 더 훌륭한 서비스를 제공했는지도 기억에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신발 걱정 말고 맛있게 드시라는 품이 넉넉한 주인장은 웬지 인상이 좋을 것 같다는 것이다. 실제 그 주인이 잃어버린 신발을 현금으로 보상해주었는지 아니면 철통같이 신발을 지키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지만 마음만은 뽀-오너스로 충분히 받은 듯 한 기분. 서툰 매직글씨의 종잇장이 깔끔하게 인쇄된 아크릴판을 이긴 순간이다. 비주얼이든, 텍스트가 되든 마음을 전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마음으로 전해지는 메시지를 쪼개고 쪼개면 결국 무엇이 남을까? 오랜 기간 함께 써왔던 모국어의 조각이 있지 않을까? 언어적 경험의 산물은 송아지가 일어서듯 단기간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언어의 성장은 더딘 법이다. 일주일에 새로운 단어 하나씩을 추가해가는 둘째 녀석을 보며 말이 조금씩 늘어가는 프라이데이와 로빈슨 크루소의 관계처럼 경험을 같이 공유해간다는 기분이 든다. 늘어나는 것은 어휘의 수에 그치지 않는다. 그와 내가 상호간에 오간 어휘가 완만하게 늘어나면서 우리의 관계도 느리지만 탄탄하게 쌓여간다는 기쁨이 있듯, 카피라이터들은 모국어라는 가장 친근한 수단으로 사람들과 대화한다. 디자이너라고 언어적 매개가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말과 글이라는 가장 순수한 재료를 다루는 영역은 누가 뭐라해도 카피라이터라 불리는 이들의 기능적 성역이다. 안다면 알고, 모른다면 모를 우스개 소리중에 제작에서 가장 쓸모 없는 직군은 바로 ‘신입 카피라이터’라는 말이 있다. 그림을 그릴 줄 아나? (가끔 잘 그리는 변종 카피가 있긴 있다.) 툴을 다룰 줄 아나? (이 역시 가끔 있다.) 보드라도 자르라 시키면 열에 하나는 피를 보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신입카피들이여 공분하여 일어나지는 말라. 내가 본 모든 병아리 카피라이터들은 광고의가장 신선한 재료를 부담없이 만지고 다듬고, 냉장고에 넣었다 빼듯 사람의 맘속을 여닫는 과정을 배워갔다. 그 유예기간은 신입아트로서는 갖기 힘든, 그래서 부럽고 샘이 나는 부분이다. 말을 다루는 느리지만 단단한 과정을 거친 카피라이터들은 재료를 잘 알기에 더욱 멋진 요리를 내놓을 수 있는 모국어의 조리사들이 된다. 그렇게 그들은 뉴욕의 제임스 프로도, 캄차카 반도의 이바픈노므스키도 알 수 없는 ‘주단’과 ‘비단’의 차이를 알며 고를 수 있는 이가 된다. 그 카피라이터들이 내놓는 맛나는 카피를 접할 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저, 요리사좀 불러주시겠어요?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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