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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

중산층

피와 살이 튀기는 슬래셔 무비나 고어물은 질색인데, 충격과 강도에서 그리 다를 것 없는 좀비영화는 이상하리만치 잘보는 편이다. 그런 좀비물 영화를 논할 때 영화평론가들이 자주 쓰는 말 중 하나가  ‘중산층의 허구’라는 말이다. 처음 그 말을 들을 땐 피튀기는 영화에 사회적 구조네 근원적 불안감입네 하며 갖다 붙이기는 잘하는 먹물들의 애매모호한 언어에 대한 거북함이 앞섰다. 그러다 작년엔가 보았던 좀비 영화의 한 장면에서 그토록 알 수 없던 중산층의 허구란 말을 명쾌하게 이해한 적이 있다. 좀비영화의 흔한 코드였는데, 떼로 몰려드는 좀비들에게 쫓기던 주인공 무리들중 하나가 살아야겠다는 눈앞의 이기심에 자기편을 발로 차 그를 좀비들의 무리속에 집어넣는다. 잠깐이나마 그는 생명을 연장하지만 결국 발로 차넣은 그는 결국 자신의 발길질에 좀비가 되어버린 이에게 처참한 말로를 맞게 된다. 동료를 구렁속으로 밀어넣고 위로 올라가야 하지만 결국 그들도 누군가의 발에 밞혀 나락으로 떨어지는 상황속에서 바둥거리며 생명연장의 꿈을 꾸지만 개미지옥같은 세상에서 모두가 최악의 상황을 면하기에 급급한 개미같은 존재들일뿐이다.

 자신을 중산층이라 생각하는 대다수 소시민들이 이상적으로 꿈꾸던 따스한 거실과 넘치는 웃음소리는 바스러지기 쉬운 환상일 뿐,  중산층이란 계층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것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가 만드는 아파트 광고에서의 가족의 모습은 우리를 얼마만큼이나 반영하는가? 몇세대전 누군가 만들어 놓은 전형적 이미지를 아직도 우린 부지런히 차용한다. 그것이 실제건 허구건간에 마음속 가족의 이미지는 딱 그만큼의 쓸모만 있을뿐이다. 웃음뒤의 빡빡한 일상은 누군가가 들춰낼 필요도 없이 다 알고 있는 현실이다. 다만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웃음의 실타래끝에 간신히 걸쳐있는 행복의 연결고리일뿐.  그리고 대다수의 불행은 그 연결고리의 인장강도가 너무 약한 나머지 어이없이 끊어져버릴수도 있다는 사실에 있다. 공덕동의 남미갱들과 신길동의 타이마피아간의 세력다툼의 와중에 발사된 사제총탄에 어이없이 맞지는 않을까? 8호태풍 ‘숙희’의 강풍에 휩쓸린 108동 1204호의 에어콘 실외기가 덮치진 않을까? 어쩌면 이보다 더 비참하고 쓸쓸한 사회적 비극은 압류경고장 혹은 느닷없는 실직통보로 간단히 시작될 수도 있다. 어처구니 없는 최후의 순간은 상상력의 가짓 수 만큼 맘속에 널려있다. 모든 불행의 가능성을 애써 외면한 채 오늘도 사람들은 바쁘게 닭을 튀기고, 트럭을 몰며, 야근을 할 뿐이다. 그러면서 그들의 숨겨놓은 이기심은 언제라도 자신과 가족을 위해 누군가에게 발길질할 준비가 되어있다.


 일요일 저녁,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날, 현관에 차곡차곡 놓여있는 포대들. 자세히 보니 흑설탕 1킬로 들이 한포대, 같은양의 백설탕 한포대 그리고 중력분 밀가루 2포대였다. 한참을 쳐다보고서야 6년전인가 7년전인가의 일이 떠오른다.  당시 북한의 핵위기, 이상기온으로 인해 불안한 현물시장때문에 식재료 가격이 엄청시리 오를 것 같다는 출처불명의 정보에 우리 부부는 난생 처음 ‘사재기’란걸 했다. 마트로 가자는 마눌님의 선제안에나는 냉큼 라면 한박스와 찹쌀을 사재기 목록에 추가했고 남들이 이 고급정보를 듣고 몰려들기 전에 냉큼 동네 대형마트로 향했다. 마트에서 힘들게 사온 물품을 부엌 귀퉁이에 차곡 차곡 쌓으며 핵폭탄에도 끄덕없는 주석궁의 지하벙커에라도 들어온 것처럼 우리의 선견지명에 안도했드랬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의 정세 전망은 반만 맞은셈이 되었다. 예상대로 물건값은 크게 뛰었지만 정작 그 많은 밀가루와 설탕을 써먹을 만한 큰일은 안타깝게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옆나라 일본의 대지진이라는 전 지구적 재앙에도 우린 남들보다 몇분이라도 더 살 수 있다면 기꺼이 필요치 않은 생수를 몇박스씩 주문한다. 바지런히 고개를 틀고 몸을 움직이지만 거대한 흐름은 거스르지 못하는 힘없는 중산층의 고단함이 유통기한을 훌쩍 넘긴 밀가루,설탕과 함께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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