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하드 드라이브가 나갔었드랬다.
나간다는 말도 없이... 열반이라도 할 요량이었는지, 잠깐 한눈 판 사이 제몸을 스스로 닫아버리고 세상과의 인연을 싹뚝 끊어버린 녀석. 단 한번도 제 몸뚱아리를 드러내 보여준 적은 없지만 내 기억의 200기가바이트를 훌륭하게 보조하며 돌아가던 하드 드라이브 디스크가 영영 멈춰버리는 악소리나는 상황이 입사 이래 최초로 일어난 것이다. 당연히 그동안 모아두었던 자료며 하루하루 드나들기 바빴던 수십개의 즐겨찾기, 내 취향이 고른 나만의 음악들, 그리고 아름다운 섬나라 여인들도 모두 함께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하니 가슴 속 한구석이 쓰리고 아리고 저려온다. AS 담당자는 자초지종을 설명하지만 기억에 남는 말이라곤 외부수리를 맡겨 보름후에나 찾을 수 있단 말과 그나마도 복구를 장담할 수 없다는 말뿐이었다. 이런 충격을 딛고 굳세게 살아가던 며칠 후, 새로 고쳐진 컴퓨터가 내품에 다시 돌아왔다. 화면을 꿈벅거리며 다소곳하게 앉아있는 컴퓨터는 예전의 그 놈이 맞지만 살갑게 대해주던 예전의 그놈이 아니기도 하다.
"나는 너를 알아보는데, 너는 왜 나를 몰라보니? 우리의 추억은 모두 다 잊은거니?"
눈물을 흘리며 컴퓨터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보지만 여전히 멀뚱 멀뚱한 표정의 예전의 내것이 아닌 예전의 내컴퓨터. 이녀석 날 기억하지 못하는 게 분명하다. 화끈하게 싹 고쳐진 노트북과 함께 복구된 데이터랍시고 얍실한 은갈치같은 DVD 2장이 전달되었는데 그안에는 데이터의 흔적들이 파편처럼 들어있었다. 살해현장에서 젓가락으로 뼛조각과 살점을 모으는 연방 수사관마냥 이래 저래 몇번 끄적거리지만 곧 그만둬 버렸다. 그 방대한 양과 귀찮음에 금방 질려버렸기 때문이다. 쓰레기 널뛰는 책상위에도 책상주인만의 분류법이 있듯이 체계적이지 못하다 여겼던 우둔한 이 머릿속도 나름대로 정보를 취급하는 자체 분류 체계가 있긴 있었나 보다. 폴더별로 분류하고 그안에 담아두었던 것이 그 폴더를 벗어나는 순간 의미는 사라져버린다. 그것이 몇억원을 좌지우지하는 텍스트이건 아름다운 비키니 사진이건 정보의 가중치는 내생각과 기준위에서만 유의미할 뿐, 생각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흩어 널부러진 은갈치속의 데이터 조각은 그냥 바이트에 지나지 않았다.
손발이 잘 맞지 않는 새 컴퓨터 앞에 멍하니 앉아 떠나간 데이터만을 떠올린다. 이번 프로젝트는 날아가버린 그 폴더 한번 뒤지면 만사오케이 일텐데 라며 쩝쩝거리는 아쉬움의 나날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삐걱댔다고 스스로 착각한 듯 싶다. 버리지 않고 어딘가에 모셔놨다는 안심차원에서 부지런히 데이터를 모으고 프로젝트를 백업하는 과정은 일종의 보험의 그 행위와 비슷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예전의 데이터를 그리 자주 열어본 적은 없는 듯 하다. 물론 천성적 게으름도 일조하지만 설사 찾아보더라도 나의 고민을 완벽하게 해결해준 기억도 별로 없었다. 그 당시에는 이거다 싶어 남이 볼새라 잽싸게 꿍쳐둔 레퍼런스도 그때쯤 다시 보면 이런 걸 왜 모았지? 라는 생각에 과감히 휴지통으로 이동시킨 경우가 많다. 그 순간의 절실함은 그때만의 독특한 시각을 갖게 해주는 법. 결과물은 예전과 비슷했을지 몰라도 매번 새로운 프로젝트의 시작만큼은 적어도 새로운 것에서 출발하려 부러 노력한듯 싶다. 아쉬움일랑 훌훌 벗어버리고 이제는 떠나간 데이터의 극락왕생이나 기원해야겠다. 예전의 데이터는 예전의 데이터일 뿐, 머릿 속 우물을 퍼내고 퍼내서 새로운 생각이 더 나오게 하자 라는 스스로 봐도 기특하고 즐거운 체념에 금방 스마일 모드로 전환.
요즘, 음악을 들으며 새롭게 신나고 있다. 부지런히 모았던 MP3 파일이 싹 날아가버린 음악폴더에 새롭게 곡을 채워놓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새로 알게되는 히든트랙들, 숨겨진 뮤지션을 알아가는 과정이 꽤나 좋더란 말이다. 세상에는 정말 훌륭한 음악들이 너무 많다. 한곳에 뭉뚱그러 있을 땐 몰랐는데 한곡 한곡 챙겨넣으며 나만의 컬렉션이 다시 완성되는 과정의 기쁨은 대화재의 잿더미에서 한층 한층 건축물을 올리는 건축대가의 느낌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런 느낌? 괜찮은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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