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 시한을 넘겨 이제서야 되지도 않는 졸문을 보내드립니다. 건강하세요”
본인이 사보 담당자에게 원고를 발송하며 즐겨 써먹는 문구다. 1년을 넘기며 글을 써왔다. 차마 글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짓거리’지만 주변에 관심있게 봐주시는 분들이 있어 매달 새로운 힘을 얻어먹고 근근이 버티고 있다. 선배님들의 주옥 같은 글에 주눅이 잔뜩 들어‘다음달엔 나도 멋진 것 하나 써야지’라고 맘먹지만 다음 마감이 다가올 때까지 정신 못 차리고 허우적거리다 땜방으로 휘갈기기 일쑤인 박 아트의 글쓰기. 애초 글쓰기가 본업이 아닌지라 거침없이 자판 위에 써내려가는 재주는 갖고 있지도 않다. 손으로 종이 위에 여러 번 지우고 쓰기를 반복하고, 교정이랍시고 띄어쓰기와 맞춤법을 네이버에 검색해가며 고친 글을 마칠 때쯤이면 이렇게 힘들게 글을 써가는 위인에게 귀한 지면을 할애한 사보 편집팀에게 위험수당이라도 지급해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매달 사보가 나올 때쯤이면 남보다 먼저 활자화된 내 글을 구석에 숨어 조용히 읽어본다. 억지로 짜맞춰 삐걱삐걱 소리를 내는 글이며, 겉멋을 잔뜩 부린 문장을 볼 때마다 분명히 내가 쓴 건 맞는데 그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내가 아닌 것 같다. 테이프에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처음 접할 때의 어색함, 딱 그런 기분이다. 글을 읽는 사람들도 그것을 느끼나 보다. 참으로 신기한 것이 재미있게 읽었다고 말해주면서도‘너답지 않다’라는 말을 종종 듣곤 한다. 얼마 전엔 공들여서 쓴 글을 아내에게 보여줬더니 하는 말이
“자기야, 자기가 쓴 것 같지 않아, 낯설어….”
순간 뒤통수는 김장훈의 돌려차기를 한 방 맞은 느낌이었다. 길어봐야 A4지 한 장, 40여 줄, 512개의 단어일 뿐인데 그 안에 나를 숨기기엔 내 미숙함이 너무 커서인가? 나란인간의 견적만큼, 그릇만큼 생김새만큼만 딱 나오는 글짓기.입력과 출력이 똑같은, 참으로 공평한 작업이다.
미대입시를 준비하는 이라면 반드시 해야 할 것이 바로 석고소묘다. 소림사에서 물지게만 지어 나르던 왕 서방도 10년이면 득도를 한다고, 석고소묘란 게 오랜 기간을 하다 보면 인생의 진리를 알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종이와 나 사이에‘톰보(Tombow)’4B 연필만이 말없이 왔다 갔다하건만 그 중간엔 수많은 기쁨과 불안, 그리고 모의고사 성적표의 숫자들이 만들어내는 번뇌들이 존재한다. ‘아그리파’는 변함없건만 그림 속의 장군께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화내기도 한다. 아~ 세상은 변함이 없는데, 변하는 건 오로지 내 마음뿐인가? 신기하게도 그림은 마음뿐만이 아니라 그리는 이의 외모까지 닮아간다. 얼굴이 길어진다거나 눈이 뱁새처럼찢어질 때마다 술 꽤나 즐기시던, 미술학원의 원장선생이자 내 그림 싸부이기도 한 양반이 50cm 자로 정수리를 내려치며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야, 그 나쁜 머리로 생각하면 답이 나오냐? 골굴리지 말고 일단은...일단 그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글은 어딘가 딱딱하고, 웃으며 쓴 글은 읽는 사람을 웃게 만든다. 그것이 잘 썼든 못 썼든 간에 한 번도 쉬지 않고 단숨에 써내려간 글을 사람들은 단숨에 읽어 내리는 법이다. 생각은 넓고 깊어야지, 많아선 안 되는 것 같다. 넓고 깊은 생각 속에 조금이라도 보이는 게 있다면 단 숨에 써내려가야 한다. 머리 싸매며 고민고민 써내려간 연애편지도 다음날 아침이면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것 아닌가?
누군가를 앉혀놓고 편안하게 말하듯 글을 써내려갈 것.
'념'이란 녀석은 질질 끌면 끌수록 깡짜를 부리거나 추레해지는 법이다. 그래야 글 속에 수수 담백한 내가 온전히 자리잡을 수 있다. 일단 생각의 끄트머리가 보이기라도 한다면 볼 것없이 냅다, 단숨에 써내려가야 한다.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세상 모든 이치가 그런 법이다. 글쓰기도 그렇고, 석고소묘도 그렇다. 광고 아이디어 내는 것도 세상 살아가는 방법도 모든 게 말이다. 그렇게 하고 나면 아마도 세상에 발가벗겨진 느낌 혹은 지상최대의 거짓말쟁이가 된듯한 느낌, 둘중 하나일 것이다. 너무 겁먹지도 서운해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우린 스스로를 누군가에게 고스란히 보여줘야 하는 사람들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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