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은 여기까지 입니다.”
게임은 끝났다. 흐믓한 미소의 본부장님, 그 옆의 팀장님은 다른 이에겐 의기양양한 미소를, 나에겐 환한 미소를 띄고 계신다. 이어서 언제나 그렇듯 '역시 네가 해냈구나....' 라는 표정의 선배님들. 그렇다 내가 해냈다! 아이디어를 쉼 없이 토해내던 우리팀원들을 생각지옥에서 구해냈으며, 경쟁사를 한번에 박살낼 업계 최강의 무기를 내가 장착시킨 것이다. 이제 우린 PT라는 전쟁에서 승리라는 전리품을 보드가방 챙기듯 대충 담아오기만 하면 된다. 유난히 사람들이 좋아했던 나의 A라인 두번째 안은... 두번째 안은... 띠리리리∼∼띠리리리∼∼
이때쯤 눈은 떠지게 마련이다. 널부러진 메모지와 늦었음을 알리는 부지런한 자명종시계가 눈에 들어온다. 차가운 현실이라는 점령군이 환타스틱 드림의 마지막 패잔병들을 내머리속에서 신속하게 몰아내는 그 순간 나는 A라인 두번째 안을 생각해내려 애쓰고 있다. 모두를 감동과 웃음으로 몰고갔던 A라인 두번째 안이? 뭐였드라? 아.....안타까울 겨를도 없이 재빨리 주변의 메모지를 뒤져본다. 새벽, 무언가에 이끌려 꿈의 마지막 자락을 붙잡고 몇 글자 끄적이던 메모지. 나를 구해주리라 믿었던 메모지엔 ‘강수지' ‘마당’ 이렇게 두 단어가 꾸물꾸물 적혀 있다. 이래선 도저히 알 도리가 없다. (그나마 마당은 명확하지 않아 ‘마담’이라 쓴 것 같기도 함.)
아무것도 한게 없다는것에 대한 사실을 거부하는 무의식속의 방어기제가 발동해 우리집 마당에서 보라빛 향기를 부르는 강수지에 관한 꿈을 꾼걸까?. 중요한 아이디어 회의를 앞두고 텅빈 머리만 준비한 날은 이렇듯 어김없이 얼토당토 않은 꿈을 꾼다. 그리고 불안불안한 마음으로 혹시나 맞이한 회의는 역시나로 끝나기 마련. 그러면서도 ‘강수지’와 ‘마당’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못한채 폴대를 살짝 스쳐간 큼직한 파울홈런을 친 선수마냥 아쉬운 마음뿐이니 아직도 나는 9회말 투아웃 역전 홈런의 꿈에서 벗어나지 못한 풋내기 광고쟁이인듯 하다.
꿈을 먹고 사는 직업을 택했으니 무지 기뻐하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던 나지만 해가 갈수록 먹고 살아갈 그 꿈을 하나씩 놓으며 몇년을 보냈다. 입사 첫날의 부푼 가슴을 먼 곳으로 보내 버렸고, 처음으로 밤샘하는 날의 팽팽함도 잊었으며 마냥 신기해 하며 모든 걸 다 빨아들일 듯한 흡입력 4만 마력의 반짝반짝 두 눈의 빛을 잃어버린 대신 여유라는 포장 속에 꽁꽁 숨겨둔 게으름과 광고관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된 좁디좁은 시야를 갖고 말았다. 노트 위에 적혀 있는 ‘강수지’ 와 ‘마당’이라는 단어를 보며 지나온 날들이 나만이 옳다는 헛 된 꿈에서 깨지 못한 채, 정작 버리지 말아야 할 소중한 것은 점점 멀리하는 그런 바보같은 날들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꿈이란 말로 새해를 연다는 것 자체가 신선함과는 거리가 먼 발상이지만 버리지 말아야 할 꿈을 다시 상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새해’와 ‘꿈’이란 말은 참 기분좋은 말이다. 적어도 1년에 한 번씩은 세상의 모든이에게 새롭게 꿈 꿀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아닌가?
꿈을 깰 것, 그리고 꿈을 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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