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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

나 좀 키워주!

"나를 믿습니까?"

 

사이비 교주의 일갈처럼 들리는 이 한마디는 촬영이 많은 요즘 내 맘속의 잦은 울림이다.

 

“눈으로 먹고 살아라, 너의 눈을 믿어라”

 

대학 시절 존경하는 은사께서 던진 말씀이다. 그분께선 수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유일하게 지금까지 내맘을 사로잡고 있는 이 한마디는 내가 앞으로 밥먹고 살아갈 일을 대하는 태도와 관련된 방향 지침으로 고이 모시고 있는 말씀이다. 하지만 모든 문제의 원인은 박아트 본인이 자신의 눈을 불신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촬영장, 특히 인쇄관련 스튜디오는

                           수많은 스태프들의 시선이 말없이 교차하는 장소이다.

 

 그곳에서 어떤식으로든 결정을 내려야하는 사람은 촬영규모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시선의 감옥속에 갇혀있어야 한다. 내 입에서 한마디가 튀어나오기까지의 침묵과 내 입만 바라보는 그 시선의 무게는 책상에 앉아 머리속에서나 떠올리며 긴장했던 만큼보다 훨씬 무거울 따름이다. 지금까지도 촬영 전날은 여전히 긴장되고 잠을 못 이루는 편인데, 지시를 받고 결정사랑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많은 연차이면서도 겪게되는 부담감이 이정도라면 내 위 연차의 선배나 팀장님들이 몸으로 받아들이는 스트레스는 얼마나 클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이 겪었을 불면의 밤, 이 한가지 이유만으로도 세상의 모든 팀장이 존경받아야 할 이유는 확실하다. 모든 업무가 그렇겠지만 촬영현장 역시 선택의 연속이다. 그 선택의 순간에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 ‘디자이너의 눈’인데 이놈이 몇년동안 내게 완벽한 신뢰를 보여준 적이 없다.  이 옷이 좋겠네요 라고 말하려는 순간 누군가 촌스럽다라고 말해버리지 않나, 촌스럽다고 말하려는 순간 극찬을 아끼지 않는 후배의 한마디에 하려던 말은 쏙 들어가는 것이다. 현대의 첨단 나노 과학으로도 측정할 수 없는 초박형 귀를 지닌 박아트의 우유부단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편집실에서 베스트 컷을 묻는 말에는 이도 저도 아닌 가장 어중간한 답을 내놓기 일쑤며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말하기 앞서 누군가가 좋아할 만할 말을 먼저 고민하는 습관은 취향과 감각의 사이에서 아슬아슬 줄다리기를 하는 꼴이다. PPM이란 과정은 해당 스태프들이 모두 모여 최종 점검하는 자리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한 다양한 사람의 다양한 판단을 구하는 일종의 시뮬레이션 과정인데, 하나 하나 다양한 검증을 필요로 하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자리다. 대부분의 모든 프로세스가 그렇지만 시간에 쫓겨 급하게 진행하다 보면 가끔 한사람의 주도에 의해 결정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결론적으로 먼저 말하자면 경험많은 이의 신속하고 정확한 판단이 광고를 더욱 세련되게 만드는 경우가 많지만 현명한 선배들의 좋은 광고가 많아질 수록 말못하고 우물쭈물한 나의 자신감은 줄어들게 마련이니, 내가 많이 부족한 건가? 라는 마음이 쌓일수록 자기 확신의 길은 흐려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체득한 방법이 생각하고 준비하기다. 온갖 가능성을 염두해두고 상황을 하나 하나 점검하는 과정을 통해 선택의 불안감은 많이 사라졌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생각은 많아져야 하고 자신의 ‘감’에 대한 시도는 끊임이 없다보니 준비과정의 스트레스는 배가된듯 하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 직면할 수록 결국 믿고 기댈 곳은 나 스스로일 뿐, 이렇게 생각과 선택을 반복하며 스스로 조바심내는 모습에 안쓰러운 맘은 촬영 후 빠져나가는 긴장의 빈자리를 채운다. 나를 이기고 억누르며 남들이 오르지 못한 고지에 서있는 기라성같은 선배들을 볼 때 게으르고 생각없는 나를 이기지 못하는 모습을 자책하는 것은 성공가도의 필수 과정이 되어버린 이 세상은 태어나면서 나를 믿는 법을 배운적이 없는 나에게 불신을 강요한다. 나를 향해 던지는 의문과 채찍질은 건강하게 만들어야지 자기 비하로 이어지면 안되는 것 아닌가? 나는 앞으로 수십년간 함께 살아가야 할 또다른 동료다. 보듬고 다독이며 살아가는 방법도 스스로 터득해야 할 미덕인 법, 나를 믿고 키워주는 건 스스로가 먼저 시작해야 할 일이다. 생각의 확산이 엉뚱하게 가지를 친 감이 있지만 촬영장에서 의상 한 벌을 고르더라도 자신을 믿고 자신의 감에 의존하며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그순간 이미 나는 그만큼 커버렸음을 확신한다. 믿어라 스스로를, 광고주와 포토그래퍼는 당신의 생각을 원하며 당신의 용기를 탐한다.

 

그러니까 내용기야 잠들지 말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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